조던 피터슨 교수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위의 그림이 익숙할지 모르겠습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책은 본질은 자기계발서이지만 이를 방패삼아 조던 피터슨 본인의 인생 철학을 담아내고 있는, 생각할 거리가 매우 풍부한 책입니다.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두번째 장에서 조던 피터슨은 인간과 죽음에 대한 매우 통찰력 있는 분석을 보여주는데 그 표지를 장식하는 그림이 바로 이 그림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화가 뒤러의 제자 한스 발동 그린이 그린 이 그림은 한국어 제목도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유명한 그림은 아니죠 (위의 제목은 본래 제목인 "The Three Ages of Men and Death"라는 본제를 직역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의 내로라하는 명화들이 수두룩한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발길을 한번쯤은 멈추게 하는 묘하게 기이하면서 신비로운 그림이기도 합니다. 이 그림이 주는 묘한 불쾌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럼에도 이 그림에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조던 피터슨 교수는 이 그림에서 어떠한 영감을 얻은 것일까요?
그림에는 네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무래도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괴상한 형태를 한 오른쪽의 남성일 것입니다. 가운데에 위치한 노년의 여성을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여성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묘한 표정으로 가장 왼쪽에 있는 젊은 여성의 옷자락을 붙잡고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젊은 여성 역시 그녀의 손길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 합니다. 반면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는 한 아기가 이 상황을 아예 모르는 듯 눈을 감고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죠.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제일 오른쪽의 남성은 사실 '죽음'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가 들고 있는 모래시게는 '삶'은 언젠가 끝난다는 덧없을 암시합니다. 그는 노년의 여성을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팔짱을 끼고는 있지만 놀랄만큼 그림속의 인물들에는 일말의 관심이 없는 모습입니다. 즉, 어떠한 사적의 감정도 없는, 그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상징에 걸맞게 무덤덤히 여성을 끌고가는 모습이죠.
그림속에 죽음이 있다면 삶도 있다. 아기, 젊은 여성, 노년의 여성은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아기는 이제 막 태어났기에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삶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눈을 감고 뒤에서 벌어지는 일에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이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기는 여전히 죽음이 들고 있는 창 끝을 잡고 있습니다. 즉, 죽음을 알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운명에 메여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죠. 반면 젊은 여성의 몸짓과 표정은 더욱 오묘합니다. 그녀는 노년의 여성으로부터 몸을 돌린채 그녀의 손길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노년의 여인과 죽음에게 눈길을 한사코 주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녀는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몸짓과 표정에서 일부러 이를 마주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죠. 그러나 이 그림에서 가장 역동적인 요소는 바로 가운데 노년의 여성일 것입니다. '죽음'에 의해 끌려가는 그녀는 반쯤 체념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 역동성을 더해주는 것은 젊은 여인을 향해 돌린 고개와 그녀를 바라보는 알수없는 표정입니다. 그녀는 어디로 끌려 가는 것일까요? 또 저 미묘한 표정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그림의 퍼즐조각을 맞추면 이 질문에 대한 화가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퍼즐 조각은 그림에 등장하는 아기와 젊은 여성, 노년의 여성이 모두 동일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서로 다른 단계의 삶을 살고 있는 동일 인물을 비교하기 위한 미술적 장치라고 보면 됩니다. 사실 이는 화가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 단서는 그림의 배경입니다.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들 너머로 보이는 황무지를 자세히 보겠습니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탑과 고통받고 있는 듯한 사람의 형상이 보이는데 이는 지옥의 탑을 그려낸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왼쪽 아래에는 올빼미가 그림을 보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고 있습니다. 올빼미가 지혜를 상징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죠. 이제 노년의 여성의 표정을 다시 보면 퍼즐 조각이 맞아 떨어집니다. 이 여성은 아마도 자신이 지옥에 끌려갈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끌려가기 전에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죠. 이제 과거의 자신, 즉 젊은 여인의 몸짓과 표정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젊었을 적 이 여인은 자신의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며, 어떻게 말하자면 미래의 자신의 경고와 원망을 애써 모른척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노년의 여인의 표정에는 원망과 경고, 그리고 아름다웠던 과거에 대한 동경과 미련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미묘한 감정이 서려있는 것이죠. 그리고 지혜를 상징하는 올빼미는 이 노년의 여인이 이제야 깨달은 듯한 삶의 지혜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제 이 그림을 볼 때 느끼는 원초적인 불쾌감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벌거벗음'에 대해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이 거의 나체 상태라는 것을 보고 우리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사실 이는 그림의 키워드인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이에 대한 모티브를 성경에서 찾습니다.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최초의 인간이 죽음에 대해 알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라는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고 에덴 동상의 모든 과일을 먹을 것을 허락하되 선악과 만은 먹지 말라고 하였죠. 선악과를 먹으면 이들이 반드시 죽게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들은 뱀의 꼬드김에 넘어가 선악과를 기어이 먹고야 맙니다. 그리고 나서 둘이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시나요? 바로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나체를 가린 것입니다. 즉, '죽음'과 '벌거벗음'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조던 피터슨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선악과를 먹는 다는 행위는 인간이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들이 태어난 이상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죠. 이는 결코 가벼운 발견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제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취약한 존재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이에 대해 철학적으로 숙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취약함에 대한 방어기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나체를 가리는 행위였던 것이죠.
그래서 이 그림에서 인물들은 헐벗은 것이 아닐까요. 사실 한슨 발둥 그린을 포함한 당시의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은 죽음과 나체를 연관 짓는 그림을 종종 그렸습니다. 옷은 일종의 사회적 보호막입니다.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애써 가리기 위해 우리가 걸치는 가림막이라고 볼 수 있죠. 반면 나체는 취약함, 무기력함, 연약함을 상징합니다. 죽음과 나체를 함께 배치함으로서 당시 화가들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 운명을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표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징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이 그림을 보고 느끼는 불쾌함이 단순히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헐벗었기 때문에 느끼는 당혹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나체는 단순히 옷을 벗음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의 취약함을 상징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죽음 앞에서의 무기력함이라는 우리의 원초적인 감정을 불쾌하게 건드립니다. 이를 더 적나라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고야의 <누드의 마야>, 마네의 <올랭피아>, 모딜리아니의 <붉은 누드> 등의 다른 누드화를 한번 감상해보세요. 이 그림을 볼 때 느끼는 불쾌감은 이런 순수한 누드화를 볼때 느껴지는 놀라움과 당혹감과는 결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올빼미입니다. 화가가 매우 의도적으로 배치한 이 올빼미는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를 불편할 정도로 빤히 쳐다봅니다. 마치 교훈을 주는 듯한 눈빛이죠. 화가가 전달하고 하는 메시지는 다분히 종교적인 메시지인 것일까요?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상투적인 교훈에 불과할까요? 글쎄요. 조던 피터슨 교수의 해석은 다릅니다. 그의 접근법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그림에 숨어져 있는 유일한 희망의 상징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을 한번 볼까요. 마치 천국을 상징하는 듯한 광원과 이를 향해 승천하는 예수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역시 다분히 종교적인 상징이죠. 그러나 지금까지 그림에서 나타났단 상징들을 되돌아보겠습니다. 죽음과 삶.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지옥과 천국. 무지와 인지.
조던 피터슨 교수는 이런 종교적인 텍스트와 상징을 해석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성경과 같은 종교적인 텍스트를 접근할 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이를 우리 선조들이 오랫동안 쌓아올린 지식의 정수이자 이를 극한으로 추상화한 상징과 이야기의 집합이라고 가정합니다. 성경이 최고의 스테디셀러이자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매료시키는데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즉, 천국과 지옥은 단순한 사후세계에 대한 내용이 아닌 것이죠. 지금 우리의 삶은 언제든 지옥처럼 변할 수 있으며 반대로 우리가 충분히 노력한다면 천국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지옥은 혼돈, 방황, 목표의 상실, 회의주의, 냉소주의, 불신, 관계의 단절 등 우리의 삶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상징합니다. 반면 천국은 목표를 향해 건설적으로 나아가는 삶, 세상을 더욱 낫게 만들려는 마음가짐, 안전한 질서와 새로운 도전 사이의 적당한 균형 등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가꾸어나가는 과정을 상징하죠. 즉, 지옥과 천국은 종교적인 도그마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수천년이 넘는 인간의 삶을 관찰해오며 성립된, 각각 가장 최악의 형태의 삶과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삶의 상징인 것입니다 (물론 이는 조던 피터슨 교수의 해석으로 정신분석학적 관점이 강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그림은 종교적 교훈을 넘어서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림의 두번째 키워드인 과거와 현재, 미래로 돌아오게 됩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기 위해, 바꾸어 말하면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조던 피턴슨 교수는 이 역시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를 넘어서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제사란 결국 희생입니다. 즉,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제물을 바치는 행위인 것이죠. 즉, 이를 바꾸어 표현하자면 '현재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미래에 그 결과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도 알고 있죠. 아, 물론 이는 상징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보자. 우리는 모두 현재에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가 마주할 미래의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이를 매우 극단적인 형태로 (종교적인 상징과 함께)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이 그림에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를 담보로 현재의 쾌락을 좇습니다다. 혹은 과거의 내가 좇았던 삶의 모습과 저질렀던 한심한 실수들에 대해 후회했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의 후회, 원망, 경고의 눈길이 이 그림 속 노년의 여성의 표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쾌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는 단순히 미래를 위해서 정말 소중한 것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미래에도 여전히 소중할 가능성이 높죠. 화가가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는 (조던 피터슨 교수의 접근법에 따르면) 현재에, 그리고 미래에 소중한 것들을 담보로 소중하지 않은 것들을 좇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미래에 후회 하지 않으려면 현재의 쾌락을 유보해야 하는 것을 잘 압니다. 지금 편한 것을 계속 좇다보면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원망할 것임도 역시 잘 알고 있죠.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의 무의미한 쾌락을 좇습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을 꼬집어준다. 미래에 투자하지 않으면 그 미래는 곧 현실이 되어 닥칠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 불쾌한 그림을 저는 좋아합니다. 욜로나 소확행이라는 말이 퍼지는 마당에 경계심을 놓고 풀어지려는 저에게 경각심을 주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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