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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Death' 속의 'Vita', 피터르 브리헬의 <죽음의 승리>

미술

by Dador 2022. 9. 29.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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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승리>, 대 피터르 브리헬, 1562년, 패널에 유화, 117 cm &times; 162 cm, 프라도 미술관 소장

 

  실로 우울한 그림입니다.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그림의 주제가 무엇인지는 바로 알 수 있죠. 죽음이 마지막 남은 인간의 마을을 덮치고 있습니다. 몇몇은 무기를 들고 저항을 해보지만 끄떡 없는 죽음의 군대 앞에 속수무책인 모습입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 하늘을 보고 울부짖는 사람, 어떻게든 도망치려는 사람, 그리고 애써 이를 무시하며 기타를 키고 있는 사람. 한때는 호화를 누렸던 왕으로 보이는 사람마저 죽음이 들고 있는 모래시계를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은 왠 거대한 궤짝으로 끌려들어가는 모습인데 이는 지옥의 입구를 상징합니다. 이것만으로 모자랐는지 화가는 바다에서부터 전진해 오는 또다른 죽음의 군대를 그려넣어 이 그림의 절망스러움에 화룡정점을 찍습니다. 

 

  이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 유럽은 14세기 대륙 전역을 휩쓴 대흑사병에서 막 회복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브리헬이 살던 독일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브리헬은 가난하던 부유하던, 종교가 무엇이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목숨을 앗아가는 흑사병의 공포를 몸소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브리헬은 살면서 합스부르크가와 발루아가 사이에서 영토분쟁을 빌미로 일어난 전쟁을 총 여섯 차례나 겪었는데 그가 40살이 채 되기 전 세상을 떠난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삶의 거의 모든 순간이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죠. 전염병과 전쟁에 시달리며 죽음이 삶보다 더 당연했던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브리헬이 위와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어찌보면 놀랍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브리헬의 이 그림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무기력함이라는 우리의 원초적인 감정을 섬뜩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코로나가 세상을 들썩였던 최근 2년간 인터넷 기사와 블로거들이 앞다투어 이 그림을 소개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무언가 특별한 요소가 있습니다. 리뷰어들은 주로 이 그림이 세상의 종말, 언젠가는 닥치는 죽음이라는 운명, 그 앞에 선 우리의 절망스러울 정도의 무기력함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죠. 이 그림에는 피터르 브리헬의 개인적인 삶, 그가 남몰래 추구했던 사상,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을 담고 있다. 이런 우울한 그림 속에 무슨 희망이 있냐고요? 글쎄요. 이제부터 한번 알아볼까요?

 

  지금은 잊혀진 미술의 한 분야가 있습니다. 기억미술(art of memory)이죠. 고대 화가들은 시각적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여 말 그대로 읽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이런 그림은 주로 정보를 후대에 전달하는 기능을 했죠. 이 기법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개발되었는데 호메르스의 음유시 같이 엄청난 양의 텍스트를 글로 남기기 어려웠을 때 (당시에는 돌에 글을 세겨야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함축하여 상징하는 그림으로 이를 대신했던 것입니다. 이후 종이가 등장하고 나서도 과학 지식, 특히 중세시대에 유행했던 연금술 같이 대중을 목적으로 한 내용이 아닌 특정 소수만 접근할 수 있게끔 한 경우 이런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아직까지도 해석이 분분한 연금술 책 「무투스 리버」로 이 책에서는 글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회화로서의 기억미술은 맥이 끊겼지만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 암기 기법 등에서 여전히 그 유산을 찾아볼 수 있죠.

 

「무투스 리버」의 한 페이지. 오늘날에는 당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이쯤 되면 왜 이 특수한 분야의 미술에 대해 설명하는지 감이 올 것입니다. 브리헬의 <죽음의 승리> 역시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억미술이기 때문입니다.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림을 언뜻 보아서는 눈에 띄는 상징이나 패턴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죠. 해골들로 가득한 이 그림속에 숨겨진 암호를 찾으려면 브리헬 만큼이나 해골을 좋아했던 다른 한 화가에 대해 잠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사들>, 한스 홀베인, 1533년 참나무에 유화 2.07m x 2.1m, 내셔널 갤러리 소장

 

  위의 그림은 독일 화가 한스 홀베인이 그린 그림입니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데 갤러리를 방문한다면 아마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 중 하나일 것입니다. 바로 바닥에 그려진 위화감 넘치는 괴상한 무늬 때문일 것인데 특정 위치에서 그림을 바라보면 이 무늬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해골이죠. 그런데 홀바인이 위의 그림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해골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작품이 있는데 바로 그의 목판화 <죽음의 무도>입니다. 물론 당시 전쟁과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던 당시 유럽의 화가들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보인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저번 포스팅에서 다룬 한스 발둥 그린의 <인간의 세 시기와 죽음> 역시 이 시기의 그림이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의 무도> 시리즈와 함께 홀바인이 제작한 매우 특이한 목판 알파벳입니다.

 

 

  

홀베인이 제작한 특이한 형태의 알파벳 목판화. <죽음의 무도>의 준비 과정 중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렇습니다. 이 알파벳은 섬뜩하게도 해골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브리헬의 그림과 유사합니다. 프라도 미술관의 미술학자 하비에르 시에라에 따르면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홀바인은 이 목판을 1524년, 즉 브리헬의 그림이 그려지기 한참 전에 완성했습니다. 또 브리헬과 홀바인은 지인을 건너 아는 사이였고 홀바인의 <죽음의 무도>는 당시 유럽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죠. 이를 고려하면 브리헬이 최소한 이 그림을 직접 보았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홀바인의 해골 상징들을 브리헬의 그림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브리헬은 그림속에 특정 메시지를 담아내려고 홀바인의 이 '해골 알파벳'을 그림속에 사용했던 것이죠. 홀바인의 알파벳 표와 브리헬의 그림을 대조하여 이 메시지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한 것도 사실이나 바쁜 여러분을 위해 브리헬의 그림 속에서 발견한 알파벳들을 아래 실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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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알파벳의 구도가 실제 그림속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여기에도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러나 여전히 두 그림이 매우 유사하며 우연이라기에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주요한 특징들을 공유하는 것을 알 수 있죠. 예를 들어 알파벳 V의 경우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이 없고 해골이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구도와 바람에 날리는 말의 갈기 등의 모습은 여전히 매우 유사합니다. 혹은 알파벳 T의 경우 물이 흐르는 물주전자라는 상징을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공유합니다.

 

  거두절미하고 그래서 이 알파벳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가장 궁금할 것입니다. 알파벳 A, I, T, V를 그림 속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재조합해보면 VITA라는 단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틴어로 vita는 '삶'을 의미하죠. 매우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홀바인은 왜 '죽음'을 그리면서 '삶'을 얘기했을까요? 그리고 왜 이 단어를 굳이 암호화 하여 숨겨놓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홀바인이 개인적으로 추구했던 사상에 대한 얘기를 해야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야기하면서 당시 유럽의 또다른 이단아이자 브리헬과도 결을 같이 하는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에 대한 얘기를 빠트릴 수 없습니다. 브리헬과 보스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이 조금 길어질 것 같군요. (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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